참고/인간

곽 흥 렬

한스 강 2016. 7. 1. 15:22

<나는 수필을 이렇게 쓴다>

  

충격에서부터 옷 입히기까지

 

곽 흥 렬

 

 

 

    선생님, 선생님은 수필 한 편을 쓰시는 데 대략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립니까?”

   글공부 하는 제자들이나 아마추어 작가들 그리고 독자들로부터 자주 받는 질문이다. 그분들은 이 점이 무척 궁금한 모양이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해 주는 대답은 언제나 한결같다.

   답이 없다는 것이 답입니다.”

   그분들은 나의 입에서 이런 대답이 나오면 퍽 의아해 한다. 아마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느냐는 무언의 의문부호일 게다.

   사실이 그렇다. 더러는 채 일주일도 걸리지 않고 탈고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경우는 이태도 더 걸려 겨우 마침표를 찍은 작품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껏 수십 년의 작가생활 동안 지상에 발표한 수백 편의 수필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이 걸려 탈고한 의 경우는 다음의 한 단락을 완성하는 데만도 자그마치 반년 가까이나 소요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했던가. 아무리 아리따운 얼굴도 세월을 비켜갈 수는 없는 법, 애석하게도 연의 이런 모습은 그리 오래 있어 주질 못한다. 이윽고 서녘하늘로부터 선들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평온하던 연 밭에도 어김없이 시절의 변화가 감지된다. 가을을 일러 숙살肅殺의 계절이라고 읊은 구양수의 글귀에서처럼, 연도 시절인연이 다하면 이 대자연의 질서 앞에 깊이 고개 숙이며 다음 생을 위해 마침내 조용히 숨을 거둔다. 그리고는 온 연 밭 가득 자신들이 남긴 육신의 형해形骸로 뜻 모를 그림문자를 새긴다. 그것은 생사윤회의 무상함을 설하려고 보낸 부처님의 편지이다. 그 편지는 흡사 난수표 같은 것이어서, 마음의 눈으로 읽지 않으면 해독이 불가능한 특수한 상형문자로 되어 있다.’

   

   이처럼 수필 한 편을 쓰는 데 걸리는 기간은 작품마다 천차만별이다. 그러니 답이 없다고 하는, 어쩌면 말장난처럼 보일지도 모를 나의 대답이 단순히 언어유희로 하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하겠다.

사람들은 흔히 글쓰기를 집짓기에 비유하곤 한다. 뼈대를 세운 뒤 살을 붙여 나가는 과정이 집을 짓는 일과 비슷한 절차를 거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말은 글을 쓰는 것이 집을 짓는 일처럼 일정한 순서대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컴퓨터에 앉기만 하면 글이 거침없이 술술 풀려 나온다고 자랑 같지 못한 자랑을 늘어놓는 이들을 종종 만난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면 한편으로는 참 재주 한번 대단하다 여겨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래가지고 어찌 좋은 글이 나올 수 있을까 싶어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쓴 글은 대다수 깊이도 없을 뿐더러 전체적인 통일성에 문제가 생기기 십상이다. 평소 이런 믿음을 갖고 있기에, 나는 글을 쓰기 전에 절대 컴퓨터 앞에 먼저 앉지 않는다.

   대신 작품을 쓸 때마다 철저히 절차에 따른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그 절차란 우선 무엇을 쓸 것인가를 정하고, 다음으로 거기에 따르는 제재를 모으며, 그러고 나서 대략적으로 얼개를 짠 뒤 집필에 들어가고, 마지막으로 글다듬기를 하는 것이다. 수많은 세월에 걸쳐 시행착오 끝에 만들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효용가치가 높기 때문일 터이다.

   내가 작품을 써야겠다고 마음먹는 것은 발상이 떠올랐을 때이다. 어느 순간 번개처럼 스치며 뒤통수를 치는 충격이 느껴지는 수가 있다. 그 충격이 온 순간 이거다!’ 하고 무릎이 쳐진다. 때로는 잠자리에 들었다가도 불현듯 상이 떠오르면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기록해 둔다. 이 전광석화처럼 번뜩이는 찰나를 붙들어 두지 않으면 다음 날 아침에 깨어났을 때 지난밤의 상이 하얗게 지워져 완전히 백지상태가 되어 버리고 만다. 이럴 때는 얼마나 허탈한지 모른다. 그러기에 황급히 필기구를 찾아선 정신없이 적바림을 해 두는 것이다. 그 순간을 놓치면 영영 기억 속으로 불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충격이 왔다는 것은 이미 작품을 절반 이상 완성한 것이나 다름없다. 창작에서 충격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충격을 만난다는 것은 작가로서는 크나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가만히 있는데 충격이 제 발로 찾아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충격 하나를 얻기 위해서 날이 날마다 고뇌한다. 길거리에 동전이 떨어져 있지나 않나 눈을 부라리고 살피듯 소재거리가 없는가 싶어 일천정신으로 헤맨다. 그럴 때 고맙게도 충격은 어느 순간 느닷없이 불쑥 나타나 준다. 가도 가도 모래언덕밖에 보이지 않는 사막에서 저 멀리 오아시스를 발견하였을 때의 기분이 아마도 이러하지 않을까 싶다.

   일단 충격을 만나고 나면 그때부터 제재를 모으는 작업에 들어간다. 이 작품의 주제를 형상화하는 데 있어 어떠어떠한 제재들을 동원할 것인가. 하늘의 별보다도 많은 소재들 가운데 이번 수필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구현하기 위해서 필요한 소재, 즉 제재 찾기 작업에 몇 날 며칠을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다. 심지어 이 기간이 한 달, 두 달을 넘어가는 수도 있다. 수필가는 잡학박사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 김문억님의 말마따나 다양한 배경지식과 정보를 동원하여야 좋은 수필이 될 것임을 알고 있고, 또한 제재가 빈약하다는 것은 그만큼 사유의 깊이가 부족하다는 반증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제재가 모아지고 나면 구상에 들어간다. 도입부는 어떻게 독자들의 이목을 끌 수 있게 하며 전개부는 어떤 이야기로 풀어나갈 것인가. 이 단계에서, 동원할 화소들을 떠올려 본다. 전환부에 가서 어떻게 반전을 모색할까. 결미부에서는 무슨 문장으로 여운을 남기게 하면서 마무리를 지을까 등등이다.

   구상하는 작업이 끝나고 나면 구성에 돌입한다. 머릿속에 머물러 있는 구상을 현실로 불러내어 보다 구체화하는 일이 구성 아닌가. 백지에다 이제껏 생각하고 궁굴린 내용을 대강 풀어내 본다. 통일성을 살피면서 화소들을 어디다 어떻게 자리 배치를 시킬 것인가 고민한다. 불필요한 화소는 이 과정에서 솎아지게 된다.

   여기까지 진행이 되고 났을 때 비로소 컴퓨터 앞에 앉는다. 이를테면 옷을 입혀 나가는 과정이라고 하겠다. 이제부터 문장이 힘을 발휘하게 되는 순간이다. 옷 입히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문장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발상이 훌륭하고 구성이 탄탄하게 짜여 졌을지라도 문장이 제대로 받쳐주지 않으면 맛을 감하기 마련이다. 똑같은 뼈대를 지녔을지라도 문장력의 여하에 따라서 글의 완성도는 크게 차이가 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우선은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이 고치를 만들듯이상이 떠오르는 대로, 붓이 나가는 대로 술술 풀어내 놓는다. 앞뒤를 재고 할 필요가 없다. 그러다 보니 이때까지는 아직 구슬들이 마구잡이로 흩어져 있는 것 같은 상태를 면치 못한다.

   일단 옷을 다 입혔다 싶으면 그때부터는 매무새를 손질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말하자면 퇴고의 과정이라고 하겠다. 천재가 아닌 이상 처음부터 모두 마음에 쏙 드는 문장들을 구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중간 중간에 꼭 들어가야 함에도 빠진 문장들이 없는가를 세심히 살핀다. 반대로 그다지 필요 없는데도 쓸데없이 들어간 문장은 없는지도 확인한다. “기교를 부리려는 모습보다 보통사람처럼 쓸 때 훨씬 매력적이다.”라거나 기둥을 세우는 일을 배우기 전에 장식하는 일부터 배워버린 글은 값어치가 없다.”라고 한 알랭 드 보통의 말은 수필 문장을 쓰는 데 있어 속 깊이 새겨야 할 금언이 아닌가 한다. 가슴에 담아 둘 만한 내용은 별로 찾아볼 수 없으면서 화려하기 그지없는 언어의 성찬에 그친 수필들을 더러 본다. 이런 수필은 알맹이는 빈약하면서도 겉포장만 요란스러운 선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다.

   가장 좋은 글과 가장 나쁜 글의 결정적인 차이를 나는 이렇게 본다. 가장 좋은 글은 아주 깊은 내용을 아주 쉬운 말로 표현한 것이고, 반대로 가장 나쁜 글은 아무것도 아닌 내용을 너무 어려운 말로 치장해 놓은 글이다. 무릇 최고의 기교는 무기교의 기교라는 말이 수필 문장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표현일 터이다.

   야구 경기를 할 때 타자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으면 홈런이 나오지 않듯, 작가의 내면에 은연중 잘 써야겠다는 욕심이 앞서면 결코 좋은 문장이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글쓰기를 할 때 혹시 쓸데없는 힘이 들어가 있지나 않나 끊임없이 살핀다. 괜히 어려운 말, 화려한 수사로 한껏 멋을 부린 글이 좋은 글이라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더러 본다. 이는 어디까지나 편견에 불과하다.

   글은 무엇보다 정교함이 생명이다. 장인匠人이 한 땀 한 땀 혼을 쏟아 공예품을 빚어내듯, 작가는 한 자 한 자 정성을 기울여 글을 다듬어야 할 것이다. 주술의 호응관계는 맞는가, 불필요한 어구의 중복이나 동일한 서술어의 반복은 없는가, 앞뒤 어절의 순서가 뒤바뀌지는 않았는가, 단어의 쓰임은 적절한가, 시제는 통일이 되어 있는가, 등등 눈여겨 살펴야 하는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가운데서도 동어반복은 퇴고의 과정에서 솎아내지 않으면 아니 될 가장 끈질긴 잡초이다. 수십 번을 읽고 고쳐 읽어도 도무지 눈에 뜨이지 않다가 마지막 순간에 발견했을 때의 그 고단한 즐거움이란…….

   퇴고는 그 속성상 아무리 거듭 하여도 지나침이 없다고 본다. 떡의 고물은 치면 칠수록 입자가 보드라워지고, 글의 퇴고는 하면 할수록 문맥이 매끄러워지는 법이다. 이것이 퇴고가 지니는 중요성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글쓰기에서 다독, 다작, 다상량의 삼다三多를 주창한 구양수歐陽修는 마음에 차는 글귀 하나를 얻기 위해 수십 매의 파지를 내면서까지 고치고 또 고쳤다고 했다.

   재주가 모자라면 대신 성실로써 채울 일이다. 나는 본시 남다른 글재주를 타고나지 못한 까닭에 부지런한 퇴고로 모자라는 능력을 벌충하는 데 힘을 쏟으려 노력한다. 이것이 독자를 배려하는 최소한의 작가적 양심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 아니 백 번도 더 고치고 다듬고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마침표를 찍고서 세상으로 내보낸다. 그런 수고를 거치고 난 뒤라야 빼어난 차림새는 못 될지라도 그다지 욕먹을 매무새는 아닐 것 같아 스스로 안심이 된다. 다만 그 이후의 것은 심판관인 독자의 몫이니 그저 그들의 처분을 기다릴 뿐이다.

<'에세이 21' 2016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