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아니 내 성적을 익히 알고 있던,
주변의 예상을 뒤업고 동계고교 진학 시험을
무난히 패스, 입시 이변의 하나로 기록되며
부모님, 학교 선생님들을 경악 시켰던, 그 해
본인 감정의 노출을 자제 하시던 부친께서도
워낙 감격하셨는지 약주 한잔 하시고 귀가시
들고 오신.. 축 합격 선물은.... 통키타 였다.
철 들 무렵부터 입시지옥에서 살아왔던 우리들은
오랫만의 자유, 해방의 시간인 고 1 일년 동안을
어찌 유용하게 보내느냐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키타,태권도,합기도,요가 등등.. 학원들을 알아보곤 했는 데
나는 태권도, 키타 학원으로 결정했다.
비록 태권도는 일개월, 키타 학원은 3 개월로
나의 문무일체 인격양성 코스는
타고난 무끈기, 무소질로 허무하게 끝나버렸지만
클리프 리차드 음악 영화도 보고, 신중현 리사이틀도
가고 디퍼플이니 로링 스톤즈니 소위 팝의 기라성들의
이름을 접하게 된 것도 그 시절이였다.
초기에는 외국팝에 열중하다
우연히 고 1 후반기던가 드볼작의 신세계 교항곡을
처음 접한 후 클래식 쪽으로 급선회가 되어,
당시 무교동에 르네쌍스가 있었는데 나는
그 곳의 몇 안되는 고삐리 단골이 되어버렸다.
교복입던 시절이라 가방에 꼬부쳐논
흰 와이셔쯔로 갈아입고 입장을 했었는데
자유와 소질배양의 시절을 일찍 접고
다시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완전무장,
대입준비에 만전태세를 갖추고 있던
대부분의 급우들과는 달리
더 중요한 문제이던 인생이란 무엇인가? 에 대해
고뇌하며, 담배 꼬나물고 똥폼잡으며 르네쌍스라는
꽃동산에 퍼져 속세를 떠나있던 내가..
앞으로 부친을 한 번 더 감격시킬 확률은 거의 없었다.
그 당시 뻔질나게 출입하던 르네쌍스는
우리나라 크래식음악의 역사에(?) 빼놓지 못할
명소중의 하나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 당시 그 곳에서 우리가곡을 중간중간 틀어주곤 했는 데
내가 좋아했던 가곡중에 변훈 선생의-떠나가는 배-
가 있었다.
당시 그 분이 대만 공사로 재직 중이라는 것만
들었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인물인지도 구체적으로
모르면서도 그냥 외교관이요 작곡가라는 점이
멋있게만 보여 ...
변훈 선생은
그 당시 나의 동경의 대상이였다.
음악이론 이라곤 기본도 없는 주제에 당장
도서관에 가 화성악 관련 책자를 빌린 후 한 페이지도 못 넘기고
책장 뒤집어 업고 작곡가가 되고 싶다는 꿈은
일치감치 포기했지만
그 당시 내 장래 희망을 -음악에 일가견이 있는 외교관으로
소박하게? 결정한 것도 순전히 그 양반 덕이다.
그 시절의 꿈이였던 외교관도 못 되었고
세월에 따라 내 희망사항도 바뀌었지만
다시 돌아가고픈 그 때 그 시절,
한때나마 나에게 꿈을 선사한 변훈 선생은 은퇴하신 후
여의도 어디던가에 크래식 카페를 열어 시인 음악가등
문화인의 공간을 만드셨다는 소식이후
지금은 작고 하셨는지 어찌 되셨는지 모르나
내 가장 좋아하는 우리가곡이요 애창곡인
떠나가는 배의 선률 속에 그는 지금도 나에게
생생하게 기억되며 살아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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