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인간

지리산의 기인들

한스 강 2009. 7. 9. 20:36

함태식(80)

 

1928 전남 구례에서 태어나 순천중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나왔다.

인천기계제작소에서 10년간 근무하다가 연탄공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지리산학회에서 지리산을 지키고 가꾸는 활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다가

1971 노고단산장의 산장지기를 자청하여 산생활을 시작했다.

지난 30년간 '지리산 털보', '노고단 호랑이' 불린다.

올바른 산행문화의 정착에 힘썼고,

수많은 조난 등산객을 구조한 있다.

1989 노고산장 직영화 조치로 좌천되어 지금은 피아골산장을 관리하면서

지리산 지킴이로 살고 있다.

 

아래는

옹이 책의 주요 제목입니다.

책의 내용은 직접 보시기 바라고 간단히 제목만 열거합니다.

제목을 일별하시더라도

함옹이 어떠한 마음으로 지리산 지킴이가 되셨는지 아실 있습니다.

 

목차 

책을 펴내며

 

1 산이 부르는 소리

 

구름바다 너머의

호기심과 동경의

국립공원 1

산장은 들어섰지만

산장지기가 되다

추위에 나자빠진 겨울

산장을 거덜 술꾼

건들면 틀어버리는 샘물

가차 없던 산장 이용수칙

벼락을 맞다

마운틴 보이

부디 스님 되거라

산장의 파수꾼들

소음과의 전쟁

노고단의 사계

철쭉제와 원추리제

내가 빚을 사람들

 

2 노고단의 추억 수첩

 

산신령으로부터의 천공

하늘 아래 동네

익는 산장

이제 담배 태우시죠

노고단 식구들

타고난 사진쟁이

거시기 산악회

산장지기 털보

진정한 산사람 허우천

조난과 구조의 나날

독사와 독초로 인한 사고

지리산의 명견 산동이

짐승에게도 그리움이 있다

스위스에서 남녀

소복을 입은 여인

헬기에 실려 내려가다

나의 병상 일지

 

3 피아골의 황혼

 

눈물로 하산선언문

흰덤봉의 희망

2 보금자리, 피아골 산장

한과 피맺힌 골짜기

살아남은 자의 슬픔

화해와 용서의 공간, 철쭉제

지금도 끊이지 않은 의문의 죽음들

피아골에는 귀신이 산다

억새에 묻힌 왕시루봉

무공해가 피는 계절

산은 만한 곳인가?

산으로 오라!

[리브로 제공]

 

(어느 분의 이야기)

 

1992 531.

전남 구례군 토지면 단산리,

섬진강변 부락에서 왕시루봉으로 오르는 산길은

신록으로 온통 파란 물감을 덮어쓰고 있는 듯했습니다.

완만하면서도 길게 이어진 능선길은 온통 철쭉의 화원이었어요.

왕시루봉으로 오르는 산길이

마치 천국으로 오르는 계단처럼 생각되기도 했답니다.

 

왕시루봉의 외국인선교사 수양촌,

지도에는 그냥 '외국인 별장촌'이라 표기돼 있었지요.

별장촌에 왕년의 '노고단 호랑이' 함태식(咸泰式)님이 은거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지난 겨울 소식을 듣고 당장 달려가본다는 것이 이런저런 일로 늦어져

날에야 겨우 발걸음을 하게 것입니다.

 

함태식님은 1971 이래 16 동안 40평짜리 단층 건물인 '노고단대피소' 지켜왔었지요. 그런데 1988 19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영의 3층짜리 현대식 '노고산장' 문을 열면서

그이는 피아골대피소로 밀려났습니다.

노고단에서 밀려난 아픔을 다스리지 못해 통음을 하고는 하던 그이가

91 가을이 저물기도 전에 썰렁한 피아골대피소에서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함태식님은 어디로 것일까요?

1991 115,

그이는 뜻밖에도 왕시루봉의 외국인선교사수양촌으로 거처를 옮겼어요.

수양촌 관리인이 것이지요.

왕시루봉에 수양촌이 건립된 다음해인 63년부터 거의 30 동안

수양촌 관리를 도맡아왔던 전남 승주군 출신의 이강협님,

40 중년으로 가족과 함께 수양관으로 이주했던 그이는

70 노령이 되어 혼자 몸으로 바뀌어 하산한 것이에요.

함태식님은 이강협 노인으로부터 수양촌 관리의 바톤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함태식님은 왕시루봉 별장촌(외국인선교사 수양촌)으로 옮긴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사실 때까지는 왕시루봉을 찾는 산꾼들도 극히 드물었지요.

그이는 교회로 쓰는 콘세트 건물 뒤쪽에 있는 방에 '王甑莊(왕증장)'이란 이름을 내걸고

왕시루봉의 새로운 생활을 은밀하게 시작한 것이지요.

조용히 은거(?) 셈이었어요.

 

하지만 '노고단 호랑이' 너무 유명했던 그이가 아니겠습니까.

지리산을 찾는 사람이라면 그이의 얼굴을 모르는 이가 없었지요.

그러니까 왕시루봉 수양촌, '인휴대(印休臺)' 머물고 있는 그이를

등산객들의 눈이 놓칠 까닭이 없었던 것입니다.

 

"왕시루봉 별장촌에 함태식님이...!"

인터넷도 몰랐던 때였지만, 입과 입으로 이런 소문이 번져나갔습니다.

그이와 친숙했던 산악인들이 서둘러 왕시루봉으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건강하면 이상 다행이 없어!"

먼길을 마다 않고 달려온 산악인들이

그이와 박주라도 나누며 산정(山情) 다지는 아름다운 정경이 펼쳐지고는 했답니다.

 

왕시루봉으로 오르는 우리 일행의 배낭에는

됫병 짜리 '寶海(보해)'소주 여럿이 들어있었지요.

함태식님의 독특한 '무애주 이론(?)'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산자락에서부터 사들고 올라온 寶海소주가

왕증장에 이르면 어느새 '무애주(無碍酒)' 된다."

25도의 소주가 왕시루봉에 이르는 산길을 오르는 동안 탈속(脫俗) 한다는 것이

그이의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시간이나 천상의 화원을 따라 올라

이윽고 왕시루봉 바로 아래편, 외국인선교사수양촌에 닿았습니다.

"얼른 와요, 얼른 !"

왕시루봉의 함태식님은 아주 건강한 모습이었어요.

그이는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주었습니다.

그이가 피아골대피소 때보다 훨씬 밝은 표정이어서

우리도 정말 다행스럽게 생각되었습니다

 

 

( 다른 분의 이야기)

 

함태식님은 1971 이래 16 동안

40평짜리 단층 건물인 '노고단대피소' 지켜오다

1988 14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영의 3층짜리 현대식 '노고산장' 문을 열면서

그이는 피아골대피소로 밀려났다.

 

그리고 지금 또다시 밀려날 처지인 같았다. 

 

 

"一切無碍人이면 一道出生死 .

 

모든 것이 거리낌이 없는 사람은/ 삶과 죽음이 하나이다.

 

나는, 인간세상을 굽어보며

무애의 삶을 살다 대자유인 원효대사의 삶을 평생 소원해 왔다.

 

그래서 나는 노고단 산장을 떠나 피아골 산장으로 옮겨오면서

산장 바로 곁에 '무애막(無碍幕)이라는 간이 휴게소를 만들어 놓았고,

왕시루봉의 왕증장에도 무애인(無碍人)이라는 간판을 달아 놓았다.

 

비록 인간세상을 떠나지 못한 일개 속인에 지나지 않지만

대자연을 삼아 살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

 

" 나는 술을 좋아한다.

노고단 산장에 둥지를 틀기 전부터 나를 아는 이들은 나를 술꾼이라 불렀고,

산장에 올라와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내가 술울 좋아하는 것은 비단 알코올에 대한 미련 때문만은 아니다.

술이 있고, 자연이 있고, 거기에 친구까지 있으니

자연 산장에서의 술맛은 여느 주점에서 마시는 술맛과 비교되지 않는다.

 

가끔 산장을 찾아오는 이가 있어 술잔을 주고받는 일이 있을 때면,

나는 항상 이태백의 대작對酌 읊조리곤 했다.

兩人對酌 山花開      둘이 앉아 술을 마시니 산꽃이 피는구나.

一盃一盃 復一盃      한잔 한잔을 마시고 한잔을 마신다.

我醉欲珉 君且去      나는 취해 자고자 하니 그대는 가시구료

明朝有意 抱琴來      내일 아침 마실 뜻이 있거든 가야금 들고 다시 오시게나

 

아침이면 산이슬을 받아 목을 축이고, 저녁이면 농익은 술독에서 술을 따라 마시니,

어찌 신선이 따로 있으리료.

나는 산행을 때도 소주 한병을 배낭에 넣는다.

특히 겨울철의 산행에서는 소주가 구급약이 수도 있다.

급격한 체온 저하 현상에는 소주 모금이 특효약이기 때문이다."

 

섬진강 참게장을 안주 삼아  소주 한잔, 매실주 두잔을  마셨다.

 

마침 화엄사 앞에 볼일이 있어 함께 산을 내렸다.

 

" 봄은 소리로부터 온다.

겨우내 잠들었던 짐승들이 기지개를 켜고, 먹이를 찾아 나선다.

발목이 빠질 만큼 덮여 있는 낙엽을 밟으며 산짐승들은 녹지 않은 개울물을 찾는다.

이때쯤 되면 산새들의 울음도 한결 여유롭다.

바야흐로 온갖 먹이들이 수줍은 고개를 내밀기 때문이다.

두꺼운 껍질에 몸을 숨기고 세찬 눈보라를 버텨낸 식물들도 서서히 눈을 뜬다.

겨우내 억누르고 있던 숨을 몰아쉬듯 움을 틔우고,

속살을 내밀어 연둣빛 새순을 만들어 낸다.

그때쯤 지리산은 연둣빛과 진녹색, 그리고 황갈색의 고운 융단을 깔아놓은 듯하다."

 

"저것 . 뿌리가 하트 모양이잖아.

  안에 발을 담으면  사랑이 온데... !"

 

"화석이야. 물고기 종류같지?

 일억만년 전엔 이곳 지리산도 바다였을거야."

산꾼 아니면 모르는 샛길을 따라 내려왔다.

함선생과 함께 하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다.

 

전엔 보질 못했던 비트들을 발견했다.  절터로도 사용되었던 같았다.

 

 "나는 혼의 존재를 믿는다.

일련의 사건들(피아골에서 일어났던 살인, 자살 사건)

위로를 받지 못한 원혼이 사람을 불러내서 일어났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원한을 달래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동족상잔의 희생자에서부터 산을 오르다 죽어간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넋을  달래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진혼과 해원을 위한 위령비를 살아 생전에 세워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나는 낙천주의자다.

나는 지금껏 살면서 낙관을 삶의 유일한 무기로 삼아왔다.

덕분에 나는 주위의 모든 우려를 떨쳐버리고 꿋꿋하고 당당하게 있었다.

낙관성이야말로 지리산이 내게 최대의 선물이었다.

세상의 변화를 모조리 포용한 묵묵히 있는 태고의 웅장함!

모든 것은 자연의 섭리대로 해결된다는 것을 나는 지리산에서 배웠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인생이,

그리고 우리의 역사가 비록 때의 시련은 있을지라도

반드시 자연의 섭리대로 따라가리라는 확신을 한시도 버린 적이 없다."  

 

수녀가 딸의 편지에 이런 글이 있었다.

 

"저는 지리산과 함께 하는 며칠 동안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습니다.

산은 언제나 침묵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산은 자기의 온몸을 파헤치는 자들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산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가슴에 품어 들였습니다.

저는 언제나 산과 같은 수도자가 있을까요....."

 

1987. 6. 21

 

오래된 나무는 죽어 버섯들에게 몸을 빌려 주었다. 

"조용히 있다가 거여. 그래서 내가 죽으면 계곡 옆에서 태우라고 거여"

 

볼일을 보는 동안 기다렸다가 주무시고 가시라며 함께 집으로 왔다.

굳이 그냥 없다며 잎새주 박스와 딸기 한광주리를 사신다.

 

"자네 '피아골'이란 영화 봤나? "

"."

"제작자가 김병기라는 라는 분인데... "

"감독은 이름을 아는데 제작자는 모르겠네요."

" 국민학교 은사님이야... 영화는 전혀 모르던 분이였는데 제작을 맡았어.

뭔가 사명감이 있었겠지.

영화 때문에 고생 엄청했지. 돈도 날리고 ... 그러다 얼마 돌아가셨어."

 

1955년에 제작된  <피아골>

빨치산을 인간적으로 그렸다는 이유로 반공법 위반에 걸려 상영이 금지되었다가

재검열을 받기 위해 이강천 감독은 결국 화면 전체에 태극기를 이중 인화해

여주인공 빨치산 애란이 확실하게 자유대한의 안긴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주는 장면으로 수정했고,

장면은 현재까지 <피아골> 마지막 장면으로 필름 속에 남아있다.

 

 

 

 

( 어느 분의 이야기)

 

"이왕 만드는 만들어야지..돈도 벌고..."

 

아침에 한잔, 점심 먹으면서 한잔, 집에서 한잔.....

 

저녁에 마시러 갔다.

 

 

 화개골 새암산방 주인장과 약속이 있었다.

"피아골 함선생님과 같이 갈테니 맛난 주시오"

 

뒷산을 넘어  1km 걸어서 왔다고 했다. 난생 이리 죽순은 봤다.

필시, 혼자 갔으면 이리 준비하지 않았을 게다.

 

도라지술에 취나물, 죽순, 고추장,

고수 무침(고수는 중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향신료의 하나이다.

중국에서는 향채라 하여 거의 모든 음식에 넣어 먹는다.)

난생 처음 먹어보는 거였다.

역한 냄새 때문에 한입 외엔 이상 먹질 못했다.

 

마시다 뻗었다. 특기다.

 

일어나 보니 함선생은 이미 가고 없었다.

나중에 전화가 왔다.

 

" 아침에 강둑 길을 따라 읍내 까지 걸어왔어. 하룻밤 놀다 가네...

 

 앞으로 피아골 산장은 자네 집이라 생각하게...

 

 언제든지 재워주고 먹여줄테니..."

 

     [출처] 지리산 산신령 '우천 허만수  / 작성자 산에산에

 

 

 

 

            이상 함태식 옹의 관한 모음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젊으신 기인 분들을 소개합니다.

요즘은 국립공원 관리공단이 국립공원 관리를 맡고 있어

옛날의 허우천이나 함태식옹같은 분이

나오려고 해도 나올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지리산에 미쳐 지리산을 떠나지 못하시는 지킴이들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아래 성낙건, 민병태 분의 이야기를 올립니다.

 

 

3. '지리산 기인' 성낙건씨

 

"산이 있고 자유가 있기에 부자"

기사입력 2003-04-27 19:06 |최종수정2003-04-27 19:06

 

지리산을 번쯤 찾아봤거나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산 사나이 성낙건(成樂建·58)씨의 이름은 낯설지 않다.(1945년생)

 

많은 이들은 그를 기인(奇人)이라고 부른다.

머리카락 휘휘 날리는 외모도 그렇지만

산과 벗하여 거리낌 없이 살아온 삶의 방식 때문이다.

 

‘죽은자(竹隱者) 허풍도사 같은 애칭도 그래서 생겼다.

 

60년대 성균관대 국문학과에 입학한 그는

군에서 제대한 복학하지 않고 서울시청 공무원이 됐다.

가정형편 탓이었다.

공무원 생활 10년에 그는 염증을 느꼈다.

“개성을 말살하면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부속처럼 살아가기를 강요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내 식으로 살자 고향인 경남 거창으로 내려왔다.

평소 산을 좋아했던 그는 모든 것을 제쳐두고 산에 올랐다.

국내의 산들은 물론 히말라야 원정도 여러 차례 다녀왔다.

일본 북알프스는 적설기에 등반했다.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다.

 

집안 살림은 처녀시절 산에 미친 성씨의 꼬임 빠져 결혼했다는

부인 남경옥(南京玉·50)씨의 몫이었다.

 

그는 올라 삶이 기쁘고 있어 죽음마저 고맙다 권의 체험적 시집도 냈다.

우리나라 남부지방의 산을 꼼꼼히 살펴 만든 등산 안내서 남녘의 그의 역작이다.

 

이런 성씨가 20여년의 방랑 끝에

최근 지리산 삼신봉 자락인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청학동 인근에 자리를 잡았다.

나무와 황토로 30 남짓한 찻집 문화공간인 다오실(茶悟室·055-883-8618)

2 걸려 손수 짓고 최근 문을 .

 

그는 청학동 문화지도와 청학동연구회를 만드는 것을 번째 과제로 삼고 있다.

청학동에 사는 선사(禪師)들의 집과 토굴의 위치, 화가와 도예가의 거처, 바위와 등이 담긴 지도를 만들기 위해 기초작업도 끝냈다.

그가 처음으로 개념을 정리한 목적산행(테마산행) 확산시키기 위해

등산꾼들과 함께 계절에 따라 약초 버섯 샘물 명상토굴 찾기와

도인 찾아뵙기 산행 프로그램도 마련할 작정이다.

다음달 18일엔 청학동 총각과 경남 진주시내 낭자 6명씩을 데리고

지리산 삼신봉에 오르는 맞선보기 산행 계획하고 있다.

40 후반부터 죽음을 소재로 써오고 있는 소설을 완성하는 것도 그의 소망이다.

 

몸과 마음이 시키는 대로 자유분방한 삶을 살아온 성씨.

산에 가는 것이 처갓집 가듯 당당해야 하고,

여름에 찬물을 마시듯 부담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그는

“가진 것이 없어도 얻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진정한 부자가 아니겠느냐 맑게 웃었다.

 

지리산=강정훈기자 manman@donga.com

 

(위의 글을 기자의 글도 참고로 덧붙입니다.)

 

지리산을 오르려면 힘이 듭니다.

가장 짧은 코스인 중산리-천왕봉 코스만 해도 왕복을 하려면 하루가 걸립니다.

지리산을 재미있게 주제별로 타는 알려드릴께요

산악인 성락건 선배한테서 배운 방법입니다.

 

그는 지리산을 등산+여행 개념으로 오를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다음 방법대로 매달 한차례 등산하면 어떨까요.

 

1 태극종주

2 계곡 탐사 산행

3 팔청학 추정지 답사

4 능선 이어주기

5 도로 따라 지리산 보며 크게 한바퀴 돌아보기

6 재를 이어주며 지리산 깊숙이 한바퀴 돌기

7 덕천강 따라 천왕봉으로

8 엄천강 따라 반야봉으로

9 금강대 호룡대 팔진대 수도처 찾아보기

10 세석고원을 이리저리 방랑하기

11 바위와 샘을 찾아 관찰하고 음미하기

12 선인들의 흔적을 찾아

 

지리산 도사가 되려면 어느 하나를 잡고 십년은 공부해야 된다고 한다.

옛날이야 지리산만 부지런히 오르면 지리산 도사를 붙여 주었지만

요즈음은 지리산도 전문분야가 있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성낙건씨의 )

 

 다오실의 (다오실 소식)

 

 1. 호랑이는 과연 있는가?

 2. 지리산으로 사라진 허우천

 3. 청학동은 어디인가?

 4. 지리산에 불가능한 등산코스가 있나?

 5. 빨치산 유품수거

 6. 지리산 구도자들

 7. 원시생활이 가능할까?

 

------------

 

 1.호랑이는 과연 있는가?

 

~

 

1962 왕시루봉 별장에서 외국인 선교사 휴린턴씨가

광주 동물원에서 가져온 호랑이 마리를 방사했는데

그중 마리는 구례 사람들이 포수를 고용해 잡았다는 소문이 있고

마리는 지리산 속으로 들어갔는데 호랑이가 요즈음 늙어 기력이 다해

사람들 눈에 띈다고 한다.

그때 왕시루봉 별장에서 호랑이 암수 새끼 마리를 놓아주었다.

놓아준 석달까지는 "기리"라는 호랑이 이름을 부르면 어디에 숨어 있다가

번개같이 발밑에 엎드리고 방안까지 들어와 놀다가곤 했다.

이듬해 왕시루봉에 소풍온 구례 국민학생들이 우연히 방사한 호랑이를 보고

혼비백산 도망쳐 내려온 소동이 있고

호랑이 모습은 왕시루봉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

지리산에 호랑이가 있는가 없는가는 항상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과

마을에 사는 사람들과 일대 논쟁으로 끝난다.

찾아온 사람들이 호랑이는 없다 하면

마을 사람들은 마디로 웃기는 이야기라며 코웃음을 친다.

믿을 수도 안믿을 수도 없어 지리산 호랑이 존재 여부는 여간 궁금한 것이 아니다.

 

- 1985 8 필자가 월간잡지에 실은

 

2. 지리산으로 사라진 허우천

 

1976 지리산으로 영원히 사라져 버린 현대 신화의 주인공

우천 허만수 선생님 백골은 물론 자취와 흔적조차 발견치 못했다.

진주, 산청, 하동, 함양에 사는 우천을 아는 사란들은

우천이 고운처럼 산신령이 되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지리산과 친구로 조화를 이루면서 잔돌박이 하늘을 지붕삼아 30년을 사시다가

영원히 지리산으로 사라진 시대의 진정한 산사람

우천(宇天) 허만수 선생님의 이야기를 하려하니 가슴부터 떨려온다.

우천 선생님은 1916 진주시 옥봉동에서 태어났다.

10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입명관고교를 다닐 때부터

산의 아름다움을 알고 산을 올랐다.

이로인해 경도전문대 철학과에 들어가 인생의 의미를 공부하고

쇼펜하우어를 좋아하는 학우들끼리 모여

아름답고 순수한 삶을 살기위한 "동정회" 동아리를 조직해 활동했다.

동정회는 장가를 가면 회원 자격이 박탈된다고 했다.

대학시절 일본의 유명한 산을 섭렵하고 인생의 의미를 깨우치면서

전문적인 산악활동까지 했다.

대동아전쟁때는 일본 수병으로 징집되어 군함에서 근무했는데

함장느 우천의 인간성에 매료되어 한국인이란 것을 알면서도 끔찍이 사랑했다고 전한다.

 

선생님은 광복이되어 결혼한 4 부인과 귀국해

지금의 진주시 대안동 상업은행옆에 민중서림이란 진주 최초의 책방을 여는 한편

끊임없는 산행을 통하여 자기 구도의 길을 열어 갔다고 한다.

부인 전경림 여사는 미장원을 경영했으며 진주 최고의 미인으로 소문나 있었다.

그러나 우천 선생님의 산으로 치닫는 산사람 열정을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우천은 지리산 세석에 올라 갈대와 거적으로 움막을 짓고

스스로 호를 우천이라 했으며

오히려 산에 살다 진주에 한번씩 내려오는 정도로 생활이 뒤바뀌자

(정자, 덕임, 영희) 부인과 인연을 멀리하게 되었다.

그런 뒤로 선생은 오직 지리산을 사랑하는 사람의 생애를 걸었다.

 

30년동안 지리산에 살면서 우천 선생님이 일은 지금도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100명이 넘는 조난자의 생명을 구조했으며

사체를 지고 산을 내려오는 일을 도맡아 하셨다.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칠선계곡과 한신계곡등 6 비경 코스를 열었으며

등산로 곳곳에 샘을 파고 보수한 것은 물론

폭우으로 유실된 등산로는 나무와 , 돌로 좋게 복구했다.

등산로 표시는 페인터로 일일이 바위에 했고

통천문에 해마다 낡은 사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군용지도밖에 없는 시절 보기 쉽고 오르기 편리하게

등산지도를 손수 만들어 무료로 등산객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선생은 1 번이 넘게 올라 지리산 정기에 흠뻑 취했으며

지리산의 고요와 아름다움을 사랑했다.

또한 지리산에서 짐승을 잡아 나가는 것을 보면 돈을 주고 사서

짐승은 지리산에 방면하고 죽은 짐승은 지리산에 정성껏 묻어 주었다고 한다.

지리산에 아름다운 꽃이나 나무 열매을 채집해 진주로 와서는

아는 분들과 산악인들에게 나누어주며 심어 가꿀 것을 간곡히 권했다.

 

선생님의 지리산 사랑은 바로 지리산과 친구 관계를 넘어

지리산의 일부로 조화를 이루었으며

끝내는 지리산과 합일됨을 궁극적 목적으로 살았음을 있다.

 

- 필자가 출판한 "남녁의 (중앙편)"에서 발췌

3. 청학동은 어디인가?

 

(청학동도)

 

옛부터 전해오는 지리산내의 청학동 후보지는

세석고원, 불일폭포 부근, 청학이골, 도인촌, 덕평고원, 고운동, 미륵정 많이 있다.

그러나 기록된 청학동의 지형조건을 갖춘 곳은 군데도 없다.

단지 지금까지 지형 근접하는 곳이 세석고원이라 많이 말한다.

사실 청학동은 특정한 지역이기 보다

우리 마음속에 그리는 낙원의 상태를

지형적으로 상징해 표시했다고 보는 것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청학동이 우리에게 존재한다면 지리산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한반도에서 지리산 만큼 포근한 우리 마음의 고향이 없기 때문이다.

난세나 재앙이 닥칠 때마다 숨어든 지리산은 어머님의 품속마냥 아늑했음은 물론이다.

기후는 따뜻하고 인심은 순박하며 토지는 비옥해 먹을 것을 풍족히 주었으며

마음과 육체를 편안히 다스려 정신과 영혼을 맑게 높이 키워주었기 때문이다.

 

 

4. 지리산에 불가능한 등산코스가 있나?

 

젊은 산악인들은 지리산이 두루뭉실해

지루하게 걷는 코스뿐이라 재미없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선택하는 방법을 모른다 뿐이지 불가능한 코스도 있다.

 

예를 들면, 표고 700m이상인 국립공원 경계를 바퀴 도는 산행,

천왕봉 - 형제봉 - 반야봉을 잇는 직선 삼각형 산행이나

천왕봉 - 삼신봉 - 노고단 - 삼정산을 잇는 사각형

또는 다른 봉을 잇는 오각형, 직선산행을 생각할 있고

천왕봉과 반야봉을 중심으로 8 산행을 계획할 있다.

이런 코스에 산행을 지원 없이 혼자서 겨울에, 밤에, 있을까?

 

 

5. 빨치산 유품수거

 

이념의 희생물이 꽃다운 젊은 빨치산들이

무명골에서 더러는 산을 내려올 솥단지, 무기, 재봉틀, 비밀문서, 등을

바위굴이나, 땅속에 숨겨 두었다는데 추적해서 찾을 있을까?

 

6. 지리산 구도자들

 

지리산에 수도라는 사람들의 숫자를 조사해 적도 없고 등록된 것도 없지만

항상 관심의 대상이다.

깨달은 사람은 드러내지 않고 드러낸 사람은 깨닫지 못한 것이라 하는데

과연 지리산에 깨달은 성인이 살고 있을까?

불가사의에 속한다.

깨달은 이를 보았다고 해도 성인을 보는 눈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판단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 지리산에는 많은 공부를 하여서

우리들이 찾아가 인사드리기만 하여도 생기를 느낄 있는 분으로

강원만, 한풀선사, 이창석, 이태천, 일공선사 분이 있다.

 

7. 원시생활이 가능할까?

 

대한해협을 해모수(뗏목) 타고 건넌 의지의 사나이 윤병철씨가

1990 봄에 달랑 한자루 차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가

7일도 못되어 배고파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는 애기를 들었다.

 

지리산 속에서 농사를 짓지 않고 초근목피로 살아갈 있을까?

지독한 빨치산들도 못했다는데....,

 

100년전 정거렁뱅이가 삼신봉 일대에 살면서 마을로 내려오지 않고

산에 나는 식량으로 살다가 사라졌다고 한다.

 

1963년에 경찰에 잡힌 빨치산 정순덕은 10 넘게 지리산에 살면서

식량을 산에서 해결한 걸로 생각된다.

 

 

 

4. 지리산 기인 민병태 

 

"겨울철 무리한 산행은 금물입니다.

지리산은 날씨 변덕이 심하기 때문에 조금의 방심도 위험합니다."

 

지리산 치밭목산장 관리인 민병태(51)씨는

내년(2006)이면 지리산에 입산한지 20년이 된다. (1954년생)

그래서 지리산에서 아홉번째 겨울은 보내는 감회가 여느 때와 다르다.

 

"올겨울 들어 내린 눈이 1m 정도 쌓였고,

지난 16일부터 폭설이 내려 23일까지 입산이 통제됐다" 그는 "눈산 등산은 즐거움이 만큼 힘도 많이 든다" 말했다.

 

1986 지리산에 들어가기로 결심,

방치된 치밭목 산장을 고쳐 그해 9월부터 산장을 관리해 민씨다.

 

천왕봉에서 동쪽으로 4 떨어진 해발 1425m 자리잡은

치밭목 산장의 요즘 최저 기온은 영하 20.

그는 온기라고는 전혀 없는 방에서 침낭생활을 하고 있다.

연료가 있지만 방울이라도 아껴 등산객 숙소에 사용하기 위해서다.

 

지리산 국립공원공단 직원도 아닌 그가 산장지기가 사연은

중학교 2학년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리산 동쪽 능선을 자주 찾던 그는 벽체만 남은 치밭목 산장을 보게 된다.

 

대학을 졸업한 중학교 체육교사를 거쳐 진주에서 농기계 부품업체를 운영했지만

험준한 동쪽능선에서 조난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죄책감에 시달렸다.

 

"산장 관리인이 있으면 조난사고를 예방할 있을 텐데"

 

그는 지리산을 관리하던 경남도 지리산 관리사업소측에 산장관리를 맡겠다고 제안,

산장관리와 조난자 구조를 조건으로 산장을 무료로 빌렸다.

 

산악회 후배 10여명과 10㎞쯤 떨어진 대원사 아래 마을에서

시멘트와 나무 등을 지게로 날라 3개월 동안 산장을 지었다.

 

비용은 사업체를 정리한 돈으로 충당했다.

 

아내(정현숙.47) 함께 입주, 고사목으로 손님용 탁자를 만들고

등산로 안내판을 붙이는 정비를 시작했다.

90 봄엔 임신한 아내를 진주 집으로 보냈다.

 

그는 치밭목~써래봉간 4 동쪽능선 4 코스를 뚫었다.

이들 등산로는 지금은 폐쇄됐다.

그의 구조활동도 빛났다.

94 4 구미공단서 근로자 5명이 독초를 먹고 신음하는 것을 후송해 4명을 살렸다.

99년에는 대학생 10여명을 24시간 만에 사투끝에 구조, 화제가 됐다.

 

그는 등산객의 산장 숙박비(하루 5000) 커피, 과자 등을 팔아 생활한다.

등산객이 많은 여름철은 한달 수입이 100만원쯤 된다.

하지만 나머지 계절엔 수입이 거의 없어 후원자 10여명의 도움을 받는다.

 

지리산이 좋아 지리산에 젊음을 바친 그도

(15,13) "산을 내려와 함께 살자" 매달릴 마음이 흔들린다.

그는 가끔 집에 들른다.

 

다리 부상 신고를 받고 한밤중 힘들게 찾아간 조난자가

"전등이 없어 내려갈 없어 거짓신고를 했다. 늦게 왔느냐" 말을 들을 때도

하산하고 싶다고 한다.

 

"조난을 당했던 사람이 몇년 찾아와 '생명의 은인'이라고 인사할

산장을 지키는 보람을 느낀다" 그는

 "준비를 철저히 할수록 사고위험은 낮은 "이라며 안전산행을 당부했다.

 

그는 97 마차푸차레산악회의 히말라야 케다르나스봉(6967m) 원정대장을 맡는

다섯 차례 해외원정을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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