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종로통에서 숱한 음악 애호가를 키워낸 '르네쌍스' 음악감상실은 이제는 '기억 속 공간'이다. 애호가들이 귀가 얼얼해질 때까지 음악을 듣던 르네쌍스는 지난 1987년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갑부가 아니면 제대로 된 오디오 시스템을 갖추기 어려웠던 시절, 르네쌍스는 호주머니가 얇았던 골수 클래식 팬들의 사랑방이자 '마니아들의 천국'이었다. 종로 1가 신신백화점(지금의 스탠다드차타드은행 자리)에서 광화문 사거리 쪽으로 2∼3분만 걸으면 르네쌍스가 있었던 영안빌딩이 나온다. 영안빌딩 4층에 르네쌍스가 있었다. 1970년대 후반의 티켓 가격은 500원. 통상 무교동 르네쌍스라고 불렸지만 정확하게는 종로1가에 위치해 있었다.

    ↑ 르네쌍스 음악감상실의 티켓.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가을 고 박용찬 씨가 대구 향촌동에서 문을 열었다. 호남 갑부 아들이었던 그가 피란길에도 레코드 2트럭만 싣고 대구로 내려갔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남아 있다. 미국의 음악전문지 에튀드는 '한국의 음악은 전쟁 중에도 살아있다'고 썼고, 외신들은 '폐허에도 바흐의 음악이 들린다'고 소개했다. 전쟁 중이기 때문이었을까. 이 음악감상실에 울려 퍼진 첫 곡은 바흐의 '마태수난곡'이었다. 르네쌍스에는 작가, 시인, 화가, 영화인, 유엔군 등으로 북적거렸다. 시인 전봉건이 DJ를 맡아 문인들을 끌어모았고 이규태 조선일보 논설위원도 DJ를 맡기도 했다. 전봉건의 월급은 담배 한 갑과 세 끼 식사였으며 해가 지면 홀의 의자를 붙여놓고 그 위에서 잤다는 것. 또한 전설적인 3희(姬)가 유명했다.

    서울대 다니던 3명의 여성이었는데 이들을 흠모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글을 쓰던 문인을 비롯해 드나들었던 예술인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작곡가 윤이상이 이곳에서 공부를 했고 철기 이범석 장군, 전설적인 인물 전혜린, 안호상 박사, 김환기·변종화 화백, 영화인 신상옥과 김희갑 등이 이곳에서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음악에 빠져들었다. 정경화·정명훈 남매들도 부모와 함께 이곳을 찾았다. 김종삼과 나운영 등은 바흐에 심취했고 박두진, 신동엽, 이진섭, 이호철, 송영, 연극배우 이낙훈 등이 단골이었다. 처음에 6000여 장의 SP 레코드로 문을 연 '르네쌍스'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청중에게 LP 레코드 음악을 들려준 역사적 명소이기도 하다. 환도 후인 1953년 단 32개의 좌석으로 낙원동에 다시 둥지를 튼 르네쌍스는 티켓 제도를 처음으로 시도했다.

    1959년 11월 종로 영안빌딩 4층으로 이전, 150좌석의 본격 음악감상실로 문을 열었다. 천장에서 바닥까지 두꺼운 자주색 벨벳 커튼으로 방음을 했다. 흰색 등받이 의자에 앉으면 정면 앞 가운데 이젤에 소형 흑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두침침한 감상실 위로 음악 몇 곡이 흐르면 DJ박스에 들어온 신청곡 순서대로 DJ가 백묵으로 음악 제목을 바꿔 썼다. 이곳에는 대한제국 시대인 1908년에 나온 레코드 판소리 적벽가와 1903년에 제작된 쇼송 작곡, 마리안 멜바 노래의 '리라꽃 필 무렵' 등의 희귀음반을 비롯해 1만5000장의 음반이 있었다.

    6척 가까운 장신(176㎝)의 거구였고,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음악팬들에게 따뜻한 음악을 선물했던 이곳의 주인장 박용찬 씨. 그는 생전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가난한 대학생들이 이곳 전화를 빌려 신문에 가정교사 등 구직광고를 냈다"고 회고했다. 2004년 별세하기 전 그가 문예진흥원에 기증한 르네쌍스 소장 앨범과 매킨토시 진공관 앰프와 메인스피커였던 JBL 하츠필드 스피커 등은 현재 서울 서초동 예술자료원에 보관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