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가 아는 것을 그 때 알았더라면>의 책 표지.
세월(歲月)이 간다고 하지만...,
흔히 세월이 간다고 들 말하나 세월은 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기억 속에 쌓이는 것이다. 그 세월 중에는 잠재되어 은둔(?)하는 것도 있고 시도때도 없이 소록소록 되살아 나는 것도 있다. 그 되살아 나는 것을 추억(追憶)이라 한다. 아름다운 추억도 있고 또 아픈 추억도 있다.
“젊어서는 꿈을 먹고 살고, 늙어서는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다. 현실적인 말인 것은 맞지만 이상적인 말은 아니다. 추억은 좋은 것이든, 슬픈 것이든 지금의 처지에 대하여 위안보다는 후회(後悔)로 귀결(歸結)된다는 것이 심리학적 견해다.
연전에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내가 지금 아는 것을 그 때 알았더라면 (What I know now: Letter to My Younger Self)”라는 책을 읽었다. 중년이 된 내가, 젊었을 때의 나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인데 성공한 40대 여성들의 편지를 묶은 내용이다.
“네게 말해 줄게 있어…”로 시작되는, 그 때 다른 선택을 하였더라면 결과가 더 좋았을 것이라는 누구나 경험했을 법도 하고 또 공감이 가는 이야기다. 이젠 성숙 된 눈으로 보니 후회스럽다는 말이다. 어찌 되었든 그들은 실패한 사람들이 아니라 성공한 사람들이다.
후회란 이전에 자신이 내린 결정이 잘못된 것이라고 느끼는 감정을 말한다. 그러나 나는, 후회란 “가보지 않은 다른 길에 대한 미련(未練)”이라 정의(定義)한다. 역사엔 가정(假定)이 성립되지 않듯이 인간사 역시 “그 때 이렇게 했더라면”의 의미가 없다.
사람의 결심은 그리 믿을 게 못 된다. 그래서 주의 기도문에도 ‘시험에 이기게 해달라’가 아니라 ‘시험에 들지 말게 해 주옵소서’라고 했다. 아예 그런 환경을 피하게 해 달라는 말이다.
마음의 평상심을 위하여 증오심을 버리라고 한다. 그러나 자책감(自責感)이 증오보다 더 자신을 피폐하게 만든다. 오히려 때로는 증오가 생명을 지탱하는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
영화 벤허에서 로마 제독 퀸투스 아리우스(Quintus Arrius)가 배의 선창에서 쇠사슬에 발이 묶인 채로 노를 젓고있는 벤허를 처음 발견하고는 “네 증오가 너를 지탱 시키고 있다”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는 벤허의 쇠사슬을 풀어 주었고 그게 결국은 아리우스 자신의 생명을 건지게 되었다. 절망이 올 때는 증오라도 있어야 한다.
우울증 환자에게는 아름다운 추억도 지우라고 한다. 왜 일까?
사람의 감각이나 감성은 그리 정확한 것은 아니다. 현재 치통(齒痛)을 앓고 있는 사람은 전에 두통(頭痛)으로 고생한 것을 잊어 버리고 세상에서 제일 아픈 게 치통이라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아름다웠던 그 추억은 현재의 처지와 비교하게 되어서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트린다.
슬픈 추억 역시 마찬가지다. 그 때의 그 환경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음에도 다른 환경을 대입하여 재 구성을 하니 그 자책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된다.
“용서하라… 잊어라…”
용서나 잊는 다는 게 그렇게 말처럼 간단하다면야 가슴앓이 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심한 경우엔 그 마음의 상처가 건강을 치고 들어오는데 김소월의 싯귀를 대입하여, “그런대로 한세상 지내시구려”라고 한다면 그런대로 살다가 죽으라는 말이 된다.
인간의 용서란 더 이상 그것을 문제 삼지 않겠다는 말이다. 남을 용서는 할 수 있으되 내 기억은 지울 수 없으니 그게 문제다.
우리 민족은 한(恨)을 다스릴 줄 아는 유일한 민족이라 한다. 팔자 탓으로 돌려서 어려운 일들을 수용할 줄도 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세계 유일한 병인, 화병(火病)을 우리민족만이 앓고 있으며, 병명이 영어로도 화병(hwabyong)이라 통용 된다. 역설적으로 우리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감정처리를 할 줄 모르는 민족이라는 말이다.
종교적인 방법이나 아니면 다른 일에 몰두하는 방법 등으로 마음을 다스리기도 한다. 종교적인 방법은 그 종교로 어떤 문제를 덮어 버리는 것이지 지워버리는 것은 아니다. 종교란 궁극(窮極)의 목표이지 성취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것에 몰두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인 것은 사계절, 24시간 몰두할 수 있는 일이 세상엔 없다.
마음에 짐이 되는 것들을 지우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변호사가 되어 내 자신에게 나를 변론해야 한다. 복잡한 것 같지만 간단하다. 과거의 어떤 상황에 대하여 자신을 합리화하면 된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애초부터가 완전할 수가 없는 피조물이다.
그 다음에는, 내가 가지 않았던 길에 대한 미련을 버리면 된다. 거기엔 내가 나를 포함하여 누구를 용서할 일도 없게 된다. 그래서 이제는 “젊어서는 꿈을 먹고 살고, 늙어서는 추억을 먹고 산다”가 아니라 “젊어서나 늙어서나 꿈을 먹고 산다”가 되어야 한다.
꿈이 있는 사람은 항상 능동적인 삶을 살게 된다. 성취란 능동적인 사고와 행동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Scarborough Fair / Nana Mouskou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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