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소스 겸용)/카페 글

바람 부는 날

한스 강 2021. 9. 19. 23:18

(Pachelbell - Canon In D, Piano)

 

바람이 몹시 부는 날, 이마저 안 하면 더 힘들어지기에 평소와 다름없이 외출했습니다.

 

인도 계통으로 보이는 걸음을 재촉하는 여인을 따라잡아 보려 했으나 마음과 달리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포기하고

나름 걷다 보니 어느 사이 그녀는 딴 방향으로 갔는지 보이지 않아 차라리 안심되었습니다.

그녀의 뒤를 본의 아니게 쫓아가게 되는 형국 이어 혹 그녀가 불안해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면했기 때문입니다.

 

신작로를 벗어나 이윽고 공원 숲길로 접어듭니다. 요즈음 새로 발견한 호젓한 산책코스로

한 바퀴 돌아 귀가하며 거처야 하는 조용한 장소이어 마음에 듭니다.

하늘은 맑고 푸르나 갑자기 몰아치는 바람에 몸은 흔들리고 걷는 도중 곳곳에 부러진 나뭇가지가 널려 있으나

개의치 않고 숲길을 빠져나와 그네와 살던 곳 건너편, 물가에 자리 잡은 벤치에 잠시 앉아 숨을 고릅니다.

 

우리 살던 아파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저기 저 3층 모퉁이에 그와 내가 창가에 앉아

지금 내가 앉아있는 밴치를 내려다 보던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나 홀로 앉아, 새 건물 어디쯤 우리 둘이 앉아 있었는지를 더듬어 봅니다.

다리도 약간 풀린 것 같은 느낌이지만 이제 돌아갈 시간.

가끔 스쳐 지나가는 자전거 외에는 마주치는 행인도 거의 없는 주변 한적한 산책코스를 가진 것을

고맙게 생각하며 무심코 걷다 보면 저 깊은 곳 마음 한구석에 사람이 그리워질 때도 있습니다.

 

내세를 믿지 않는 나이니, 당신은 그 어디에도, 어떤 형태로도, 이제는 존재하지 않고

내 마음속에만 머무는 그리움이 되어버렸지만 이리 바람이 부는 날, 당신은 지금 어디쯤 있나요.

어딘지는 모르지만, 이 모진 바람을 피해 따뜻한 곳에 자리 잡고 앉아, 나를 생각할지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보며 마음을 달래 봅니다.

 

나 자신도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는 날, 우리의 만남과 헤어짐, 그간의 추억들,

살아남은 자의 어설픈 그리움도, 모든 것이 소멸하겠지요.

 

끝나는 그 날 까지는 그대로 이렇게 그리움에 젖어보기도 하렵니다.

당신을 끝까지 기억하는 사람은 나 뿐일 테니까요.

 

오늘 나 자신과의 약속, 하루 7천 보 걷기 지키고, 나 집으로 돌아갑니다.

사랑하는 당신, 내 소리 못 듣겠지만, 항상 평안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