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똥벌레 / 신형원
벗 붕(朋), 벗 우(友). 수요가 있는 곳엔 반드시 공급이 따르는 게 세상의 이치다. 그런데 수요자가 되면서도 동시에 공급자가 되는 게 있다. 내가 누군가의 친구가 되면서도, 그가 나의 친구가 되는 유대관계가 그런 경우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염원처럼 바라는 게 있다면 ‘이런 친구하나 있었으면’ 하는 것 일 것이다. 물론 그런 친구가 있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인류의 가장 기본적인 윤리를 제시한 유교의 삼강오륜(三綱五倫)에 포함될 정도로 친구란 예로부터 인생에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유안진(柳岸津)은 수필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며’를 통하여 그녀가 원하는 친구에 대한 몽타주(Montage)를 그려 놓았다. (前略) 우정이라 하면 사람들은 관포지교(管鮑之交)를 말한다. 그러나 나는 친구를 괴롭히고 싶지 않듯이 나 또한 끝없는 인내로 베풀기만 할 재간이 없다. 나는 도(道) 닦으며 살기를 바라지 않고, 내 친구도 성현(聖賢) 같아지기를 바라진 않는다. (後略) 공자는 ‘지초와 난초가 있는 방에 오래 들어가 있으면 냄새를 느끼지 못하나 그 향기에 동화 된다’ (子曰, 與善人居 如入芝蘭之室 久而不聞其香 卽與之化矣)고 했다. 그러나 중년을 넘어서면 청소년들과는 달리 누구의 영향을 받아서 변할 나이는 아니다. 공자는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을 친구로 삼으라 했으나 유안진은 본인과 비슷한 사람을 친구로 하고 싶어한다. 친구란 물리(物理)에서의 공명현상(共鳴現象)처럼 둘이 서로 형태가 같을 때에 한쪽의 진동만으로도 다른 한쪽에서 같은 소리를 낼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관계이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나? 우선은 서로 편한 사람이 친구의 첫째 조건이다. 무례(無禮)를 행해도 되는 그런 내 쪽만의 편리함이 아니라 상대의 주장이나 행동에 공감이 오는 그런 편안함을 말한다. 상대가 감상적인 사람이라면 나도 그 정도는 감상적이 되어야 하고 나의 현실주의적 감각의 정도 만큼은 상대도 그래야 서로 편한 사이가 된다. 우선순위가 서로 같다면 목표도 서로 일치하니 그 역시 중요하다. 원죄론(原罪論)을 주장하던 어거스틴(Augustine)과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던 펠라기우스(Pelagius)는 서로 상치(相値)되는 주장으로 논쟁을 하였으나 학문적 친구가 된 경우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보통 사람이라면 평범한 일상에서의 공통점이 있어야 한다. ‘이번엔 네가 좋아하는 산으로 가고 다음엔 내가 좋아하는 바다엘 가자’는 것은 산과 바다만의 차이가 아니라 더 많은 상이점이 내재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친구를 찾기 위해서는 길거리에 좌판을 벌려놓은 노점상처럼, 이런저런 자기 생각을 표현을 해야 한다. 설령 횡설수설이 될지라도 친구가 될 사람은 그것을 용하게도 알아 듣는다.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 오면, 또한 즐겁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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