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탄(風樹之嘆). “사람은 하나의 갈대에 지나지 않으며, 자연계에서 가장 약한 자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우리의 존엄성은 완전히 생각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채울 수 없는 공간과 시간으로서가 아니라 이것, 즉 생각으로 우리의 가치를 올려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올바르게 생각하도록 힘쓰자. 이것이 도덕의 근본이다.” 흔히 우리가 인용하는 파스칼의 ‘생각하는 갈대’, 그가 주장하는 사고(思考)의 위대함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와는 다른 성질을 가진다. 데카르트의 명제가 존재와 그 인식에 관한 것이라면, ‘생각하는 갈대’는 인간 존재의 실상을 언명하고 있다. 파스칼, 그는 물리학자, 수학자, 저술가, 발명가라는 복수의 직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을 말한 이도 이 사람이다. 22세에 계산기를 발명했으며 물리에서의 압력의 단위를 그의 이름을 따서 파스칼이라 명명 되었다. 39세에 병사를 하였다. 그러나 사람은 그 처지를 떠나서는 생각을 할 수 없다.
흔한 말로 객관적 사고가 어떤 문제의 해법이라 알고 있으나 그 사람의 주관을 초월 할 수는 없다. 그 주관이 사실은 그 사람의 처지가 되기 때문이다. 어느 민족이나 그 고유의 명절이 있다. 그 명절이 즐거운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연들도 있다. 옛날에는 교통편이 여의치가 않아서 어디를 가더라도 최소한 하루 정도는 묵어야 했지만 요즘은 도로나 교통의 발달로 불과 몇 시간 얼굴만 보고 떠나거나 아니면 피치 못할 사유로 명절임에도 부모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 피치 못할 사유가 자식의 처지가 되니 부모의 해석과는 차이가 날 수있고, 또 그게 부모는 상처가 된다. 樹欲靜而風不止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만두지 않으며 子欲養而親不待 자식은 봉양하고자 하나 부모님은 기다려 주시지 않네 往而不可追者年也 가고 오지않는 것이 세월이요, 去而不見者親也 떠나가시면 다시 볼 수 없는 것도 어버이 이시라. 학창시절 어느날 수학선생님이 수업에 들어와서 칠판에 적어 놓았던 풍수지탄(風樹之嘆)이다. 말없이 한문만 적어 놓고 창가에 서서 한시간 내내 밖을 응시하시다가 시간을 마쳤던 그 특이했던 수업시간이 가끔 생각 난다. 처음엔 내용을 몰라서 웅성대던 학생들도 한문을 새긴 쪽지가 한바퀴 돌고 난 후엔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고 오히려 그 침묵의 수업이 학생인 우리들의 뇌리에 더 각인이 되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당시에 그 선생님은 부친상을 당하셨었다. 머리로만 알고 있던 풍수지탄(風樹之嘆)을 상을 당한 후에야 가슴에 와 닿았으리라는 추측이다. 그래서 지식이나 학식은 내가 그것을 체험하기 전까지는 내 것이 아니라 남의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제 내가 환갑을 지나고 보니 풍수지탄(風樹之嘆)을 인용하기가 부담스러운 입장이 되었다. 자칫 업드려서 절 받는 그런 오해를 받을까 염려가 되어서다. 행여, 이번 추석에 자식들 때문에 상처가 있었다면 이 글로 위로 받으시기를 원한다. 훗날 우리가 이 세상에 있든 없든 간에, 자식은 늦게라도 그것을 깨닫는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는 이미 자식이었던 때가 있었으니 현재 부모인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순리에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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