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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홍랑(洪娘)과 최경창(崔慶昌)의 사랑.

한스 강 2008. 10. 7. 19:28

홍랑(洪娘)과 최경창(崔慶昌)의 사랑.

 

사랑은 창문을 닫아도 스며드는 달빛처럼 은은히 왔지만 그 에너지는 생(生)과 사(死)를 초월하는 위력이 있다. 개인 뿐만이 아니라 국가간의 전쟁도 일으켰고 또 그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국가간에 혼인도 하였었다.

 

그 사랑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그 답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많은 실례들을 통하여 추측을 할 뿐이지 당사자가 아니니 그 애절함을 누가 짐작이라도 할 수 있으랴. 다만 분명한 것은 극작가 김수현씨가 토해 내 놓는 그런 미사여구가 사랑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435년 전, 함경도 경성(鏡城)의 관기 홍랑과 그 지방으로 부임한 북도평사(北道評事) 최경창의 만남이 있었다. 당시에 위험한 변방에 부임하는 관리는 가족을 동반할 수 없는 국법으로 인하여 최경창은 처자를 서울에 둔 채 홀로 그곳에 부임하였다.

 

함경도 홍원 출신인 홍랑은 기생으로 비록 신분은 비천했으나 교방(敎坊)에서 각종 악기와 가무를 단련하면서도 문장과 서화 등의 기예 익히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관아의 연회장에서 흥을 돋우고 미색을 흘리는 여느 기생과는 그 품성과 재주가 남달랐으나 누구나 다 꺾을 수 있는 노류장화로 머물지 않았다.

 

그 문학적 소양과 재주는 이미 양반 사대부나 유명한 시인 가객들에 뒤지지 않았으며, 일부종사를 맹목으로 실천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기생이었지만 자신의 정절을 받쳐 사랑할 운명적 만남을 꿈꾸며 몸을 함부로 놀리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남자들의 유혹은 도를 더해갔으나 홍랑은 아무에게도 자신의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런 소양과 식견을 이미 갖춘 홍랑이니 새로 부임한 당대의 삼당시인(三唐詩人) 또는 팔문장(八文章)으로 명성이 높았던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을 단번에 알아 볼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죽 최경창은 탁월한 문장가인데다 음률을 잘 알고, 악기를 다루는 재주 또한 뛰어났던 인물이었으니 시화에 음악에 둘은 막힘이 없었다. 그는 도학자(道學者)의 모습보다는 풍류객 기질(風流客 氣質)을 지녀 북도평사(北道評事) 시절 군막(軍幕) 속에서도 세인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홍랑과 지냈다.

 

그러나 이듬 해 봄, 사랑하는 두 사람은 이별을 해야만 하게 되었다. 최경창의 임기가 끝나서 서울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 이별에 대하여 항거할 묘책이나 힘이 그 두 사람에게는 없었다.

 

눈물로 밤을 지새운 홍랑은 최경창을 배웅하며 따라 나서서 몇 일만에 함관령(咸關嶺)고개에 도달 하였다. 노비 신분인 관기 홍랑은 그 경계 이상을 넘을 수 없었다. 메어지는 가슴을 달래려던 홍랑은 길옆에 피어나는 산 버들가지를 꺾어주며 시조 한수를 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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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의 손에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이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이미 날은 저물고 비는 내리는데 피할 수 없는 이별 앞에서 홍랑도 최경창도 그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후에 최경창은 홍랑의 시를 한역하여 다음과 같이 남겼다.

 

折楊柳                버들가지 꺾어

 

寄與千里人          천리 머나먼 님에게 부치오니

爲我試向庭前種   뜰 앞에 심어두고 나인가 여기소서

須知一夜新生葉   하룻밤 지나면 새 잎 돋아나리니

憔悴愁眉是妾身   초췌한 얼굴 시름 쌓인 눈썹은 이내 몸인가 알아주소서

 

함관령에서 홍랑과 애끓는 이별을 뒤로 하고 떠나온 최경창 역시 서울에 돌아온 뒤 곧바로 병으로 자리에 누워 그 해 봄부터 겨울까지 일 년 내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최경창이 아파서 누워있다는 소식은 바람에 바람을 타고 멀고 먼 경성의 홍랑에게도 들렸으니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그녀가 아니었다.

 

이 소식을 들은 홍랑은 곧바로 경성을 출발하여 서울을 향해 길을 나섰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하여 7일 만에 서울에 이르렀고, 곧 바로 병석에 누워 신음하는 최경창을 찾아 갔다.

 

거의 2년만에 최경창을 다시 만난 홍랑은 그의 수척함에 마음이 아팠지만 잠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조석으로 병수발을 들었다. 그 결과 최경창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도로 차츰 회복되어 갔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두 사람의 재회는 뜻밖의 파란을 몰고 왔다.

 

홍랑과 최경창이 함께 산다는 소문은 최경창이 홍랑을 첩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로 까지 비화되었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1576년(선조 9년) 봄에는 사헌부에서 양계(兩界)의 금(禁)을 어겼다는 이유로 그의 파직을 상소하기에 이른다.

 

결국 최경창은 당쟁의 세력다툼이 치열한 당시 사회의 표적이 되어 파직 당했고, 홍랑은 나라의 법을 원망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경성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양계의 금’이라고 하는 것은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의 서울 도성출입을 제한하는 제도를 말하는데, 함경남도의 홍원 출신인 홍랑이 서울에 들어와 있는 것을 문제로 삼은 것이었다. 거기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때는 마침 명종 왕비인 인순왕후가 돌아가신지 1년이 채 안 된 국상 중이라 홍랑의 일은 결국 최경창을 파직까지 몰고 가는 불씨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두 연인의 애틋한 재회는 파직과 이별로 막을 내렸지만 최경창은 자신을 향한 홍랑의 지극한 사랑을 가슴 깊이 새기게 되었는데, 안타깝고 가여운 자신의 마음을 ‘송별’이란 시에 담아 떠나는 홍랑에게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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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같은 뺨에 두 줄기 눈물로 봉성을 나서는데

이별의 정 때문인 듯 새벽 꾀꼬리 울고 운다.

깁 소매에 보마(寶馬)를 탄 정관(汀關) 밖에서

풀빛만 아득히 먼데 홀로 떠나가누나.

                       

                    又

 

끊임없이 서로 보며 그윽한 난을 주노니

이 하늘 가 떠나가면 어느 날 돌아오랴.

함관(咸關) 옛 곡조를 부르지 마소

지금에도 구름비에 푸른 산이 어둡구려.

 

 

옛날, 함관령에서 이별할 때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보내며 이 가지를 자신처럼 여겨 달라 했던 그녀의 시에 최경창은 난초 한포기를 건네는 것으로 화답하며 자신의 애끓는 심정과 쓸쓸한 홍랑의 마음을 위로했던 것이다.

 

홍랑과의 두 번째 만남과 이별 후에 곧바로 파직을 당한 최경창은 변방의 한직으로 떠돌다 1583년(선조 9년) 마흔 다섯의 젊은 나이로 객사하고 만다. 멀리 함경도 땅에서 사랑하는 임과 다시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홍랑에게 날아든 최경창의 사망소식은 그녀로 하여금 몸조차 가눌 수 없을 정도의 슬픔을 안겨주었다.

 

죽은 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死者不可還生) 법이니 이제는 두 번 다시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통한에 홍랑은 목을 놓아 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홍랑은 곧 바로 마음을 추슬러야만 했다. 객사를 했으니 무덤을 돌보는 사람이 마땅히 없을 것이란 사실에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최경창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파주에 당도한 홍랑은 무덤 앞에 움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시묘살이를 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생각 끝에 방법을 생각해낸 홍랑은 몸을 씻거나 꾸미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다른 남자의 접근을 막기 위해 천하일색인 자신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하여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추녀로 만들었다.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홍랑은 또한 커다란 숯덩어리를 통째로 삼켜서 벙어리가 되어 스스로 병신이 되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시묘살이 하는 것에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으니 그 덕분에 홍랑은 최경창의 삼년상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3년간의 상을 마친 뒤에도 고죽의 무덤을 떠나지 않은 채 그의 영혼 앞에서 살다가 죽으려 했던 홍랑이었지만 하늘은 그녀에게 그런 작은 행복조차도 허락하지 않았으니 바로 임진왜란의 발발이 그것이었다.

 

홍랑 한 몸이야 사랑하는 임의 곁에서 그 즉시 죽더라도 여한이 없지만 그가 남긴 주옥같은 문장과 글씨들을 보존해야 했기 때문에 죽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최경창이 남긴 유품을 챙겨서 품에 품은 홍랑은 다시 함경도의 고향으로 향했는데, 그로부터 7년의 전쟁 동안 그녀의 종적은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전국토가 황폐화할 정도로 잔혹했던 전쟁 중에서도 오늘날까지 고죽 최경창의 시와 문장이 전해지게 된 것은 지극한 사랑과 정성으로 그것을 지켜온 홍랑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살랐던 홍랑은 전쟁이 끝난 뒤 해주 최씨 문중에 최경창의 유작을 전한 후 그의 무덤 앞에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하게 된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누군가를 위하여 나 스스로를 구속 하는 것, 죽음도 그 구속을 풀지 않는것, 생각만 해도 전율이 나는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이 바로 사랑이다.

 

홍랑이 죽자 해주 최씨 문중은 그녀를 집안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최경창 부부가 합장된 묘소 바로 아래 홍랑의 무덤을 마련해 주었으니 현재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다율리에 있는 해주 최씨의 문중 산에 그녀의 무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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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랑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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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랑의 묘비(詩人洪娘之墓)
 

죽음조차도 갈라놓을 수 없었던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은 양반 사대부 문중까지도 감동시켰으니, 비록 천민의 신분이었지만 최경창의 묘소 바로 아래에 그녀를 머물게 하였던 것이다.

 

유교적 질서가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시대적 질곡을 뛰어넘어 조선시대의 기생으로는 유일하게 사대부 가문의 족보에까지 올라간 홍랑, 그로서 그녀에 대한 사랑을 확인할 수 있을까?

 

전남 영암 구림리(鳩林里)에 있는 동계사(東溪祠)는 고죽 최경창(1539∼1583)을 비롯한 해주최씨(海州崔氏)의 위패를 봉안(奉安)한 사당이다. 그 앞에 고죽 최경창시비(孤竹 崔慶昌詩碑)가 있다. 시비(詩碑)에는 홍랑(洪娘)의 시와 이를 한역(漢譯)한 고죽 친필시(親筆詩)를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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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계사의 시비


숨 막히는 사랑과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절개로 홍랑이 지켜냈던 최경창의 유작은 그 후「고죽집」이라는 문집으로 만들어졌고, 그의 글은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해주고 있는 것이다.

 

 

  마음 / 정강.

출처 : 아름다운 60대
글쓴이 : 환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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