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내 나이 65세, 나는 육군대령으로 예편한 후 최근까지 직장에 다니다가 은퇴했다. 자식들 다 성가시켰고, 식구들 건강하고, 가난하지 않으니 과히 나쁜 팔자는 아니지 싶은데, 늘 허기지고, 텅 빈 들판에 혼자 서 있는 것 같다. 이 나이쯤이면 달관이야 못했을망정 마음의 평정은 유지해야 하는데 늘 일렁인다.
늦가을 접어들고 찬바람이 불면 도하 각 일간지에는 신춘문예모집 방이 붙는다. 이때쯤부터 오랜 기간 습작의 시간을 보낸 문학지망생들은 설레며 수많은 밤을 지새운다. 수도 없이 퇴고를 거듭한 원고를 접수시킨 후 그들은 새해 첫날의 신문을 기다린다. 기대와 희망에 차서, 혹은 미진하고 미흡함에 미리 포기하거나 절망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의 천재성을 과신한 나머지 터무니없는 공상에 사로잡혀.
나는 젊은 시절 한때 문청이었고, 27살 육군대위로 월남전에 참전할 때까지만 해도 문학병을 앓았다. 나는 월남에 갈 때만 하더라도 멋진 전쟁소설을 한편 쓸 수 있으리라는 꿈을 가졌다. 그러나 월남에서 돌아오면서 동지나해 바다에 그 꿈을 던졌고, 돌아와서 문학을 묻었다. 나는 문학의 꿈을 포기하는 대신 내 삶의 전쟁터에서 조국과 내 가족을 위해 치열하게 싸워야했다.
내가 던져버린 꿈, 묻어버린 문학은 이제 치유된 폐결핵처럼 석회질의 공동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문학을 잊고 지낸 세월동안, 내가 사서 읽는 소설책은 기껏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정도였다. 물론 매년 새해 첫날 가판대에서 산 여러 신문에서 신춘문예당선작들을 읽는 정도의 성의는 표시했다. 그것은 잃어버린 꿈, 묻어버린 열망에 대한 향수였고, 떠나보낸 연인에 대한 연모 같은 것이었다.
이제 문학은 꽃가루 알레르기나 찬바람이 불면 재치기와 함께 찾아오는 알레르기비염 같이 것이었다. 늦은 가을 각 신문에 신춘문예 모집공고가 붙으면 그 병은 잠시 나를 찾아왔다가 저절로 사라지는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치유된 줄 알았던 그 병은 몇 년 전부터 활동성 폐결핵을 변해 지독한 독감처럼 나를 괴롭히고 있다. 나는 몇 편의 소설을 써서 몇 군데 신문사에 보낸바 있는데 결과는 물론 낙방이었다. 발표를 기다리는 동안은 여러 공상으로 행복했으나, 뒷맛은 허탈하고 씁쓸한 것이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본격적으로 소설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디지털대학에 등록했다. 배울수록 난감하고 절망감이 앞선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은 주로 노인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노년의 삶에 관한 것이다. 누구나 늙는다. 노년은 인생의 궁극적인 풍경이다. 인생의 '화양연화'시절이 덧없이 지나가고 나면 누구나 늙고 병들고 외로워진다. 노인인구는 갈수록 늘어가고 있다. 그러나 문학은, 소설은 아직은 그들을 조명하는데 인색하다. 나는 그들의 세계를 잘 알고 있다. 자기가 잘 아는 것을 쓸 때 소설은 진실해지고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젊은 작가나 지망생들은 할 수 없는 분야이지 싶다. 장사도 남이 하지 않는 것을 할 때 승산이 있다. 나는 ‘노인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싶다.
나는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나는 아직도 꿈꾸고 싶다. 꿈의 날개를 내 겨드랑이에 달고 싶다.
그 날개가 꿈꾸는 곳으로 날아가다 녹아내려 추락하는 이카루스의 허망한 날개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 이 글은 요즘 제가 수강하고 있는 디지털 대학에서 "당신은 누구이며,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라는 과제에 대한 제 답변 글입니다. 그냥 심심풀이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내 나이 65세, 나는 육군대령으로 예편한 후 최근까지 직장에 다니다가 은퇴했다. 자식들 다 성가시켰고, 식구들 건강하고, 가난하지 않으니 과히 나쁜 팔자는 아니지 싶은데, 늘 허기지고, 텅 빈 들판에 혼자 서 있는 것 같다. 이 나이쯤이면 달관이야 못했을망정 마음의 평정은 유지해야 하는데 늘 일렁인다.
늦가을 접어들고 찬바람이 불면 도하 각 일간지에는 신춘문예모집 방이 붙는다. 이때쯤부터 오랜 기간 습작의 시간을 보낸 문학지망생들은 설레며 수많은 밤을 지새운다. 수도 없이 퇴고를 거듭한 원고를 접수시킨 후 그들은 새해 첫날의 신문을 기다린다. 기대와 희망에 차서, 혹은 미진하고 미흡함에 미리 포기하거나 절망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의 천재성을 과신한 나머지 터무니없는 공상에 사로잡혀.
나는 젊은 시절 한때 문청이었고, 27살 육군대위로 월남전에 참전할 때까지만 해도 문학병을 앓았다. 나는 월남에 갈 때만 하더라도 멋진 전쟁소설을 한편 쓸 수 있으리라는 꿈을 가졌다. 그러나 월남에서 돌아오면서 동지나해 바다에 그 꿈을 던졌고, 돌아와서 문학을 묻었다. 나는 문학의 꿈을 포기하는 대신 내 삶의 전쟁터에서 조국과 내 가족을 위해 치열하게 싸워야했다.
내가 던져버린 꿈, 묻어버린 문학은 이제 치유된 폐결핵처럼 석회질의 공동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문학을 잊고 지낸 세월동안, 내가 사서 읽는 소설책은 기껏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정도였다. 물론 매년 새해 첫날 가판대에서 산 여러 신문에서 신춘문예당선작들을 읽는 정도의 성의는 표시했다. 그것은 잃어버린 꿈, 묻어버린 열망에 대한 향수였고, 떠나보낸 연인에 대한 연모 같은 것이었다.
이제 문학은 꽃가루 알레르기나 찬바람이 불면 재치기와 함께 찾아오는 알레르기비염 같이 것이었다. 늦은 가을 각 신문에 신춘문예 모집공고가 붙으면 그 병은 잠시 나를 찾아왔다가 저절로 사라지는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치유된 줄 알았던 그 병은 몇 년 전부터 활동성 폐결핵을 변해 지독한 독감처럼 나를 괴롭히고 있다. 나는 몇 편의 소설을 써서 몇 군데 신문사에 보낸바 있는데 결과는 물론 낙방이었다. 발표를 기다리는 동안은 여러 공상으로 행복했으나, 뒷맛은 허탈하고 씁쓸한 것이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본격적으로 소설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디지털대학에 등록했다. 배울수록 난감하고 절망감이 앞선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은 주로 노인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노년의 삶에 관한 것이다. 누구나 늙는다. 노년은 인생의 궁극적인 풍경이다. 인생의 '화양연화'시절이 덧없이 지나가고 나면 누구나 늙고 병들고 외로워진다. 노인인구는 갈수록 늘어가고 있다. 그러나 문학은, 소설은 아직은 그들을 조명하는데 인색하다. 나는 그들의 세계를 잘 알고 있다. 자기가 잘 아는 것을 쓸 때 소설은 진실해지고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젊은 작가나 지망생들은 할 수 없는 분야이지 싶다. 장사도 남이 하지 않는 것을 할 때 승산이 있다. 나는 ‘노인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싶다.
나는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나는 아직도 꿈꾸고 싶다. 꿈의 날개를 내 겨드랑이에 달고 싶다.
그 날개가 꿈꾸는 곳으로 날아가다 녹아내려 추락하는 이카루스의 허망한 날개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 이 글은 요즘 제가 수강하고 있는 디지털 대학에서 "당신은 누구이며,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라는 과제에 대한 제 답변 글입니다. 그냥 심심풀이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출처 : 아름다운 60대
글쓴이 : 마르케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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